작성자: 김경민
업로드: 2025.4.9
농인들의 개인적인 언어 ‘홈사인’
‘언어’란 단어는 대체로 국가 공용어, 문자 체계, 혹은 수화처럼 공인된 체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사전에 없는 언어도 존재하는데요. 그중 하나가 바로 농인들의 홈사인(Home Sign)입니다.
말 대신 만들어낸 언어, 홈사인
홈사인(Home Sign)은 농인이 정식 수어를 배우지 못했을 때, 일상 속에서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즉흥적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비공식적 몸짓 언어 입니다. 표준화된 문법이나 단어 체계는 없지만, 가정 내에서는 실질적인 의사소통 수단이 되는 것이죠. 홈사인은 보통 다음과 같은 조건에서 발생합니다. 농인들 중 공식 수어를 배울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경우에도 ‘홈사인’이 생기게 됩니다.
•
국가 차원의 수어 교육 및 보급이 부족한 경우
•
농학교를 다니지 못한 '무학 농인'의 경우
•
지역 사회나 농인 커뮤니티와 단절되어 있는 경우
이처럼 홈사인은 농인이 사회적 언어 공동체에 접근하지 못한 채, 고립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해 만들어낸 언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홈사인’은 공식 수어와 다릅니다
홈사인은 수어(Sign Language)와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공식 수어와는 다릅니다.
공식 수어는 문법과 어휘가 정립되어 있으며, 공동체 내에서 사용되는 언어 체계입니다. 반면 홈사인은 사용자 가족 안에서만 유효하며, 서로 다른 홈사인 사용자들끼리는 소통이 불가능합니다. 즉, ‘언어’의 기본 조건 중 하나인 사회적 상호소통 가능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문제점 또한 갖고 있는 것이죠
또한 홈사인은 대부분 단편적인 제스처로 구성되어 복잡한 개념이나 감정을 정확히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이는 곧 의사소통의 불균형과 감정적 단절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코다와 홈사인의 교차-영케어
홈사인을 사용하는 농인 부모 아래에서 자란 코다(CODA), 즉 청인 자녀 역시 홈사인을 배우며 자랍니다. 하지만 이들은 공식 수어와 청인 언어,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소속되지 못한 채 이중언어 결핍 상태에 놓이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이는 어린 나이에 부모의 통역자 혹은 돌봄 제공자로서 역할을 하게 되는 '영 케어러(Young Carer)'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출처: 보건복지부 -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코다(CODA), 일곱살 나희 이야기|참사람|ep.01
언어 접근권의 사각지대
홈사인은 개인이 혼자 만든 언어가 아닙니다. 사회가 만들어내지 못한 언어의 빈자리를, 스스로 채워야 했던 결과입니다. 특히 교육 기회를 놓친 ‘무학 농인’ 세대에서 홈사인이 흔하게 관찰 됩니다. 그들은 한국 수어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없었고, 수어를 사용하는 공동체와도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농인으로 태어났지만 언어 공동체 없이 살아가야 했던 이들인 것입니다.
이때 가족 안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 홈사인인 것으로, “먹다”는 손으로 입을 가리키고, “화났다”는 인상을 쓰며 손을 듭니다. 언뜻 보기엔 수어처럼 보이지만, 이는 표준 수어가 아닌 가족끼리 가까운 사이에만 통용되는 개인의 언어입니다.
의사소통인가, 고립의 신호인가
홈사인은 가족 간에만 통용되기 때문에, 오히려 사회적 고립을 고착화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표준 수어를 배우지 못한 농인은 농 커뮤니티와 소통하기 어렵고, 청인 사회와도 단절된 채 ‘가족 안에서만 통하는 언어’를 쓰게 됩니다.
또한 가족같이 가까운 사이에 통용되는 홈 사인은 수어 통역사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문제 또한 있습니다. 그렇기에 특수한 통역사가 따로 있기도 합니다. 바로 문맹 농인의 의사소통을 돕는 농인을 ‘농통역사’라고 합니다.
홈사인을 사용하는 가족의 자녀, 코다는 어릴 때부터 가족의 통역자가 됩니다. 듣고 말할 수 있는 청인 자녀로서, 어린 시절부터 홈사인으로 부모와 대화하며 자라고, 세상과 가족 사이를 중재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코다는 일종의 ‘영 케어러(Young Carer)’, 즉 장애 가족을 돌보는 미성년 보호자 역할까지 떠안게 됩니다.
언어는 권리다
홈사인은 생존의 언어였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가 농인의 언어권을 외면해온 증거이기도 합니다. 언어를 배울 기회를 주지 않았고, 배울 수 있는 환경도 만들지 않았던 결과인 것이죠.
농인의 언어가 가정에서조차 ‘사적인 몸짓’에 머물러야 했다면, 그건 언어권의 부재입니다. 농인에게 수어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홈사인은 그 부재 속에서 자라난 언어이고, 동시에 사회가 책임져야 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참고 문헌
더 다양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COM-US 인스타그램